다시 쓴 일기
BIFF 2018 <가족여행> 잉량 감독
글 조지훈 사진 소동성 / Festival / 2018-10-20

영화 한 편으로 완전히 인생이 바뀐 감독이 있다. 중국의 독립영화감독 잉량이 그렇다. 그는 장 위엔, 왕 샤오수와이, 지아 장커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 6세대 감독 이후 등장한 2000년대 중국의 신진 독립영화 감독 중 가장 대표적인 감독이었다. 2005년 <아버지를 찾아서>로 데뷔한 그는 2011년까지 총 3편의 장편영화와 4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영화들은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해외 평단의 주목과 함께 수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화창할 것 같았던 그의 ‘중국’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은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만든 네 번째 장편영화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을 통해 완전히 바뀌었다. 사형을 당한 어느 살인자의 엄마 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부조리한 사법 시스템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기 전까지 중국 당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재편집과 상영 취소, 영화 폐기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당국의 회유와 압박을 거부하고 영화 상영을 강행했다. 이후 영화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 상영되어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전 세계 많은 영화전문지들은 이 영화를 2012년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잉량 감독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현재 가족들과 함께 홍콩에 거주하며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가족여행>은 잉량 감독이 자신의 실제 삶을 토대로 6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신작이자 그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주인공은 정부 비판 영화를 만든 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홍콩에 살고 있는 여성 영화감독 양수다. 영화는 대만의 한 영화제에 초청받은 양수가 중국의 단체 여행객에 섞여 대만에 온 어머니와 5년 만에 재회하는 과정을 그린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현실을 다루지만, 전작에 비해 인물의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하면서도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를 훨씬 더 다층적이고 밀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이 영화에는 2012년 이후 만든 그의 모든 영화들이 호명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가족여행>은 2012년 이후 잉량 감독이 만든 영화들의 총합인 동시에, 잉량 감독의 영화 인생에 있어 중간 결산과도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살이 많이 빠져서인지 전보다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살이 빠진 건 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느라 그렇다고 했다. 그는 영화 한 편으로 인해 뒤바뀐 자신의 인생을 곱게 갈아 넣은 이번 영화에 대해 언제나 그랬듯 과장이나 흥분 없이 담담하고 조심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2012년 이후 6년 만에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축하한다. 어떻게 시작한 영화인가?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2012)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최근까지 홍콩에서 이방인처럼 살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영화 찍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단편영화 <엄마의 고백>(2017)을 찍을 기회가 생겼고, 그 때 많은 친구들이 지지해주면서 장편영화로도 만들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걸 보면서 ‘좋다. 그럼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단편영화와 비교했을 때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친구들이 많은 것들을 도와줬고, 운도 좋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순조롭게 완성할 수 있었다. 단편영화와 장편영화는 거의 동시에 대본을 썼고 촬영도 함께 진행되었다. 준비는 6개월, 촬영은 15일 정도 했다. 이 영화에는 지난 5~6년 동안의 내 과거와 삶이 개괄적으로 정리되어 담겨있다. 영화를 통해 내 경험을 관객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내 과거와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겐 5살 난 아이가 있는데, 다른 일반적인 가정과 달리 우리 가족의 삶이 복잡하다보니 나중에 아이가 자랐을 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영화를 만든 건 내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랄까, 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대만으로 와서 만나는 설정은 실제 경험인건지 아니면 극적 설정인지 궁금하다.

사실 2012년 이후 지금까지 거의 6년 동안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대만으로 여행을 온 가족을 만난 경험이 있기는 한데, 3년 전 쯤 대만에서 처갓집 식구들을 만났다.

 

<가족여행>(2018)은 단편영화 <엄마의 고백>(2017)과 같은 이야기를 가진 한 쌍의 영화다. <엄마의 고백>은 어머니의 관점으로 풀어낸 흑백단편영화이고, <가족여행>은 영화의 주인공인 여성 영화감독의 관점으로 풀어낸 장편영화다.

처음에 아내와 함께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당시에 어머니를 5년 정도 못 본 상태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할까, 만약 이런 여행이 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떤 말을 할까를 집중적으로 상상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거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형식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단편영화에는 내 경험과 주관적인 상상들이 뒤섞여 있는데, 말하자면 말로 하는 소설 같은 거다. 그래서 흑백화면을 활용하면 색감이 단조로워지기 때문에 관객이 어머니의 이야기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장편영화는 일종의 여행이야기인데, 일상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다. 보통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황막하고 단조로운 느낌이 있는데, 장편영화는 이런 것들을 중심에 두고 싶었다. 이게 단편영화 <엄마의 고백>과 장편영화 <가족여행>의 가장 큰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마의 고백>
<가족여행>

<가족여행>은 당신과 프로듀서 겸 작가인 당신 부인이 함께 겪은 이야기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부인보다 당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가족여행>의 주인공을 여성 감독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까?

세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반자전적인 이야기이고, 나의 실제 경험이 많이 담겨있기 때문에 관객들이 영화를 보자마자 ‘아! 이거 감독의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길 바라지 않았다. 사실 나처럼 떠돌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영화를 완성해서 주변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봤는데 친구들 반응이 하나같이 ‘이거 너희들의 이야기잖아’였다. 그래서 더욱 나를 잘 모르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내 이야기로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영화의 작가 3명 중 2명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나였고, 또 한 명은 본명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내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홍콩에서 나고 자란 여성 소설가이자 굉장히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였다. 작가 2명이 여성이다 보니 집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관점이 많이 반영되었는데, 어느 순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도 여성 예술가가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상황을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좋은 선택일 것 같았다. 세 번째 이유는, 사실 시나리오의 첫 버전에서는 주인공이 남성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나와 너무 가까웠다. 자꾸 주인공과 너무 많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난 감독으로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데, 과연 관객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공감해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 영화를 일상적인 여행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신에 대해 모르는 관객 입장에선 영화의 톤이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좀 전에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는 내 삶과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나의 경험을 관객, 무엇보다 아이와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동안 중국에 갈 수 없게 된 후 만나지 못하는 지인과 친구들과도 공유하고 싶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연락도 하고 교류도 하지만 단순히 언어로만 교류하는 것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무엇보다 인터넷으로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이런 생각들만 해서 그런지 사실 이 영화가 무거워야 할지 가벼워야 할지에 대해 특별히 고민해본 적은 없다. 다만 상처를 주는 영화, 비극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를 만들면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안정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어느 정도의 시선을 유지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매우 어려웠다, 아니 잘 모르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분명한 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거다. 굳이 이 영화를 다른 중국 영화와 비교해보자면, 티엔 주앙주앙 감독의 <푸른 연>(1993)을 꼽을 수 있겠다. 과하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시선을 유지하는 영화인데, 이번 영화와 비슷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2012) 이후 당신의 영화 속에는 존경할만한 어른 캐릭터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캐릭터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국가에 대한 상징이나 감독 본인의 바람이 담겨있는 캐릭터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웃음) 예전에 영화를 만들 때는 청년들의 이야기, 아이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 영화에 나왔었던 어른들은 청년과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어른이었다. 당시 생각했던 어른은 배울 게 없고 믿을만하지 못하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주로 부정적인 면을 봤다. 그런데 홍콩에 있으면서 4년 정도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쳤고, 결혼 생활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가족과 어른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 성숙해졌다고 할까. 그래서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2012)과 단편영화 <9월 28일, 맑음>(2016)을 찍으면서는 나도 한 아이의 아빠로서 아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내 영화 속에 나오는 존경받을 만한 긍정적인 어른 캐릭터에는 내 경험과 전해들은 이야기들이 함께 뒤섞여 있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2012)
<9월 28일, 맑음>(2016)

<가족여행>은 주인공인 영화감독 양수의 일기로 시작하고 이 일기가 영화 중간 중간에 인용된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림과 함께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노래와 시가 함께 나온다.

영화가 시작할 때, 그리고 영화 중간에 나오는 양수의 일기는 촬영을 마치고 우연한 기회에 영화에 넣게 되었다. 주연 배우였던 공저가 캐릭터에 몰입하는 방법으로, 프리 프로덕션과 촬영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연기하는 양수의 입장에서 일기를 썼다. 그 안에는 글, 그림, 사진 등 많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일기의 내용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손 글씨도 마음에 들어서 배우에게 다시 써달라고 요청해서 영화에 넣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림은 10여 년 정도 그림을 그려온 홍콩 화가의 그림이다. 이 화가가 <기차>라는 대만 소설을 토대로 그린 그림들이 있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그림에 대해 알게 되었고, 미술감독과 상의해서 20장 정도를 선택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 영화 속 가족이 가진 복잡한 정서를 교감하는 예술적인 매개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감독과 남편과 아이는 할머니의 모습이 담겨있는 이 그림을 통해 어떤 정서를 공유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시와 노래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이미 있었던 설정이다. 1950년대 동남아를 유랑했던 화교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인의 삶도 그렇고, 이 노래와 시가 영화 속 가족 이야기와도 잘 맞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시를 읽는 목소리는 여주인공의 목소리다.

 

엄마 역을 맡은 배우 나이 안은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에서 살인자의 엄마로도 나왔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에서도 그랬지만 이 영화에서도 존경 받는 어른의 모습을 기품 있고 우아하게 연기해낸다. 하지만 <가족여행>에서 엄마는 전작과 상당히 다른 인물이다. 다시 나이 안에게 엄마 역할을 맡긴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다른 주요 배우들의 캐스팅 과정도 듣고 싶다.

사실 나이 안 배우와 다시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준 이후, 나이 안은 중국의 많은 영화감독들과 작업했다. 영화마다 각기 다른 역할들을 연기했는데,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속 엄마의 흔적들이 다른 영화에서 계속 보였다. 그러다 보니 <가족여행>의 엄마는 완전히 다른 엄마인데, 또다시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의 엄마로 보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컸다. 그래서 초반에 영화를 준비하면서 나이 안과 솔직하게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럼 다른 배우들을 테스트해보라며 여러 배우들을 추천해주었다. 그런데 영화 내용이 위험이 너무 크고 차기작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보니 추천해준 대부분의 배우들이 영화 내용에 대해 많이들 걱정했다. 홍콩과 대만에서도 많은 배우들을 소개 받았는데, 건강상의 이유, 집안 문제로 거절한 경우도 있었지만, 역시 앞으로의 경력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개받은 많은 배우 중에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배우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함께 할 수 있었던 배우는 나이 안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에서 테스트를 했는데 하자마자 ‘아! 이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동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주인공인 영화감독 양수 역할을 맡았던 배우 공저는, 나이 안이 가장 먼저 추천해준 배우 중 하나였고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처음에 이 배우와는 인터넷으로만 교류했는데, 먼저 내 작업 방식을 설명했고, 이 영화에 참여하면 안게 될 위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내가 배우와 작업하는 방식을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아침에 호텔에서 밥을 먹는 장면에서 할머니랑 아이가 사진을 찍고 있고 아이는 도망가고 그 와중에 감독은 옆에서 대본을 쓰고 있는 상황이 있다고 하면, 난 배우들이 인물과 이 상황에 대한 모든 디테일을 다 알기를 바란다. 이 인물이 전날 잠을 제대로 잤는지 못 잤는지, 아침에 먹은 음식이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 속이 불편한지 아닌지, 머리가 어지러운지 괜찮은지, 이런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 물론 이런 미세한 것들이 다 보여 지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는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이것을 알았을 때 결국 연기로 표현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저에게 이런 나의 작업 방식을 설명했다. 다행히 공저는 내 방식에 매력을 느꼈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작업으로 인한 위험 역시 본인이 감수를 하겠다고 말해주었다. 공저 씨는 전문 배우가 아니다. 배우 일도 하지만 그림도 그리고 촬영도 하는 아티스트다. 그리고 남편 역할에 대해 설명하자면, 시나리오 단계에서 남편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를 많이 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가장 긍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남편은 모든 좋은 일은 다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도 못한 선행을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 역할을 할 배우를 캐스팅할 때 너무 잘생기거나 긍정적인 이미지가 바로 보이는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 처음엔 홍콩 배우들을 여러 번 만났는데 홍콩 배우들은 너무 깔끔하고 한 눈에 봐도 ‘아, 이 사람 좋은 사람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어서 캐스팅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한 말레이시아 배우를 만났다. 말레이시아의 많은 독립영화에서 주로 폭력배 같은 어두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였다.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생기는 어떤 반전의 느낌이 있다. 이게 좋았다. 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중화권 배우들에게는 위험이 크다보니 캐스팅 단계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지는 않았다.

<가족여행>
<가족여행>

공저가 연기한 양수라는 인물이 과장되어 있지 않고 매우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엄마를 오랜만에 만나 반갑고 엄마와 더 가깝게 시간을 보내고 싶을 텐데, 양수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일을 끊임없이 한다. 틈만 나면 시나리오를 고치고, 메모를 하고, 차기작을 위해 배우를 만나고, 자신을 대만으로 초청해준 영화제 관련 행사에 참여한다.

영화 속에서 영화감독 양수는 창작 활동과 현실 생활을 오가는데, 어쨌든 창작 활동은 현실 생활의 일부다. 그러므로 감독이 만들어내는 세계에는 현실에서의 다양한 모습들이 반영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창작 활동이 현실의 운명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나나 영화 속 양수의 모습이 그렇다. 양수라는 인물은 영화 내내 영화감독이라는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한다. 왜냐하면 그 인물이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이 일인 거다. 좋은 딸도 아니고 좋은 엄마도 아니고 좋은 아내도 아니고 심지어 정체성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양수가 자신과 관련해서 가장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영화감독’이라는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수는 영화 내내 복잡한 상황에서도 자꾸 일에 집중한다. 이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일이고 ‘영화감독’이라는 확실한 직업적 정체성이 양수에게 안정감을 주는 거다. 하지만 이 여행은 그렇게만 진행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족여행 중에 끊임없이 자신이 지금까지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과 계속해서 맞닥뜨려야하기 때문이다.

 

대만으로 여행 온 중국 단체 여행객 중에 할아버지가 한 명 나온다. 영화 중반 쯤 그 할아버지가 손자를 통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고 엄마가 도와주겠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뒤에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더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단체 여행객들은 모두 배우들이다. 단체 여행객들과 관련해서는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의도적으로 캐릭터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관계의 여행객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추가해서 만든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여행객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굳이 영화 끝까지 이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함께 단체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나.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자 주인공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나 옷들은 아직 중국에 독립영화제가 남아 있을 때인, 2012년 중국독립영화제의 기념품들이다. 지금은 이 영화제들은 다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영화제의 유품이나 유물인 셈인데, 결국은 모든 것이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숙명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도 굳이 이야기로 연결해서 영화에 담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제작과 관련해서 보면 당신은 데뷔작부터 작년까지 주로 혼자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 여행>은 그동안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일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영화들보다 예산도 많이 필요했을 것 같다. 파이낸싱 과정을 듣고 싶다.

그동안의 영화와는 달리 많은 분들이 영화에 참여했다. 예산도 더 필요했다. 그동안의 방식과 다르게 만들었던 것은 실력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영화에 투입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환경이 만들어지면 다른 데 신경을 덜 쓰고 감독이나 작가로서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 특히 이번에는 촬영과 미술 쪽 전문 아티스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었고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영화 제작비는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약 20만 유로(약 2천 6백만 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이 영화가 시장 가치가 그렇게 큰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비즈니스 기회로 보고 투자한 사람들은 없었다. 7~8개의 회사가 영화에 참여했는데, 개인적으로 기부를 하신 분도 있었고 대만의 공공TV라던가 이런 펀드들로부터 제작비를 확보했다. 하지만 재무업무라던가 행정업무에서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다.

<가족여행>

대만 로케이션 촬영을 가오슝에서 했는데, 가오슝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중국에서 대만으로 오는 관광객들의 도착지는 가오슝 또는 타이베이 둘 중 하나다. 그래서 이 도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가오슝을 선택했던 이유는 대만의 남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먼 느낌이 들기도 했고, 타이베이처럼 정치의 중심지가 아닌 점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이번 영화의 내용이 정부 또는 정치와 관련되어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가족 간의 교류와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오슝(高雄)’이라는 단어를 중국어로 들었을 때 그 느낌이 굉장히 좋았는데 ‘높을 고’자와 ‘웅대할 웅’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남성적이고 큰 느낌을 많이 받았다. 도시 이름이 가진 어감과 대비해서 이 영화는 여성적이고 세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난 삶의 일상에서 크고 엄청난 이슈들에 가려지는, 그래서 소홀하기 쉬운 소소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 로케이션 관련해서 두 가지 정도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첫 번째는 시나리오를 쓰고 준비를 할 때부터 촬영할 때 바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가오슝에서 답사를 할 때 바람이 불었고 실제 촬영을 할 때도 감정 선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때마침 신기하게도 바람의 변화가 있었다. 두 번째는 이 영화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 단체여행객들이 사원을 가는 장면이 있어 촬영할 사원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가오슝에서 찾았던 사원은 여러 가지 이유로 끝까지 촬영을 거부해서 가오슝의 근처 타이난에 있는 공자묘에서 촬영을 해야 했다. 거기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찍었는데 우연하게도 옆에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어서 굉장히 가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장면은 양수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었는데, 때마침 이야기와 관련된 장소에서 촬영하게 되었다.

 

당신은 영화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 최근 국제 정세를 보면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당신은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절감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도 기자가 양수에게 중국 사람이냐 홍콩 사람이냐 물을 때 ‘나는 이방인이다’라고 대답하는 장면도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은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을 담은 영화를 계속 찍고 있다. 당신에게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다. 그리고 차기작 계획이 있나?

영화는 내게 친구 같은 존재다. 다행히도 영화라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내 생각을 표현하면서 생활 속의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영화로 만들어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또한 내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게 되고, 때로는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집필하고 촬영하는 모든 과정은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다. 영화를 통해선 이런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이방인의 생활, 방황,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 이런 것들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울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현재 다음 영화를 위해 자료 조사 중이다. 역시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즐겁다.

ⓒ소동성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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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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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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